주요한(1900∼1979)
-호는 송아(頌兒). 1900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주공삼의 장남으로 출생.
-숭덕소학교 재학 중 동경 조선인 유학생 선교목사였던 부친과 함께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및 동경 제일고교를 졸업.
-메이지학원 재학시절 프랑스 신낭만주의 폴 포르, 앙리 드 레니에 등과
서구 이미지즘 신인들의 영향을 받음.
-일본 유학 시절 <현대시가>, <서(曙)> 등에 일본어로 시를 발표.
-1918년 가와지류코의 추천으로 일본 시단에 정식 등단.
-유학시대에 민요시론과 밝은 시론의 기초 형성.
-1919년 <<학우>> 창간호에 <에튜우드>를 발표
-1919년 김동인과 함께 ‘창조’를 발간<불노리 ,해의 시절 등 3편>.
-1919년 5월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
안창호, 이광수 등과 교류, 호강대 화학과에 진학.
상해 망명 중 <<창조>>에도 작품을 발표.
-1924년 <시집 아름다운 새벽> 간행.
-1925년 귀국하여 이후 민요시 운동 및 건강하고 밝은 시론을 펴냄.
도산의 수양동우회를 이광수와 함께 이끌음.
-1929년<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거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
-1929년 이광수, 김동환과 <삼인시가집>
-1930년 시조집 <봉사꽃>
-1935년 소설집 <사막의 꽃>
-1919 창조에 수록된 시와 1924년 아름다운 새벽은 김억과 함께
근대시의 출발점.(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시적 주체의 확립과
자유시형 확립: 산문적 자유시의 벽을 무너뜨리는 공헌.
주요한의 시세계: 상해 망명 이전의 초기시와 망명후의 후기시
-초기시는 서구 및 일본의 근대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남김.
-프랑스 상징시인인 폴 포르(Paul Fort)의 영향으로 산문적 표기와
인상의 감각화 기법이 뛰어났고 <불노리>에 잘 반영.
-밝음과 의지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이상주의적 지향의 시로
<해의 시절>, <아침 처녀>등이 있음.
-<봄>연작시에서 민요 및 동요조의 경향을 나타나며
이는 민중에 가까이 가려는 그의 시도로 보임.
-전통지향적인 민요시 창작은 후기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남.
-상해망명 시절의 작품들은 이국에서의 망향의 그리움과 이국적 풍물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상해 이야기>, <지나 소녀>, <공원에서>등이 있음.
-평론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에서 민족정서와 사상을 표현.
-국어의 미와 생명력을 창조할 것을 강조하여 본격적인 시론을 개진.
-주요한은 안서 김억과 마찬가지로 한국 초기시단의 개척자로서,
서구모방의 시풍에서 다시 전통지향의 시풍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줌.
1930년 이후에는 시조창작 외에 간혹 시를 쓰기도 함.
김 억(1896∼ ? )
-호는 안서(岸曙), 호적명은 희권(熙權), 1896년 11월 30일 평북 곽산
(정주)에서 출생.
-오산중학을 거쳐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熟) 문과를 중퇴.
-1914년 학지광에 <이별>등 발표.
=1916년 오산중학(김소월 발굴) 및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생활,
-1918년 ‘태서문예신보’를 통해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들과 베를렌 등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 소개하여 근대문학 형성기의 국내시단에 커다란 영향을 줌.
-1919년 이후 ‘폐허’와 ‘창조’의 동인
-<기탄잘리>(1923),<신월>(1924), <원정(園丁)>(1924) 등의 번역시집을 통하여
한국시단에 R.타고르를 소개.
-1925년 이후에는 서구편향적인 자기 시관을 비판: 민족적 형식인 민요시
되찾기 운동. 민요조 서정시<금모래>(1925),<안서시집>(1929) 등
격조시'(格調詩)라는 이름으로 7.5조 4행의 정형률을 창안, 장시<지새는 밤>(1930)
-제자 김소월(金素月)을 문단에 길러내어 그와 함께 1920년대 민요시 창작에 참여.
-1921년 최초의 번역시집<오뇌의 무도>: 한국시단의 상징적, 퇴폐적 경향을
가속시킴.-그르몽, 사맹, 예이츠, 보들레르의 시를 수록.
-에스페란토에 깊은 관심과 보급을 통해 서구시에 접근하고자 노력.
-1923년 최조의 개인시집<해파리의 노래>:인생과 자연을 민요형식으로 노래
노래한 것이 특징.
-주요한과 더불어 초창기 한국시단의 기초를 마련.
-베를렌의 애상적 정서와 음악성을 강조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근대적’인
것으로 봄.
(주요한: 프랑스의 밝고 목가적인 신낭만주의의 계열시를 ‘근대적’이라 봄)
-한국 시사는 김억을 통해 자유시형을 확보.
-<동아일보>.<매일신보> 기자, 경성 중앙방송국 차장 등으로 언론계에서 활동.
-8.15후 출판사 수선사(首善社) 주간을 역임, 6.25 때 납북.
-북한에서는 출판사 교정원(1952)으로 일하다가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1953.4),
-이후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에 강제 임명(1956.7),
-다시 평북 철산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이주(1958).
-그 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음.
-개성적 리듬과 자유율 및 아어체(雅語體) 시어를 통하여 개인 정감을
노래함으로써 근대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열어줌.
-<개벽>, <동광>, <학생계>등에 관여하여 문단저널리즘의 정착에 기여.
-<프랑스 시단>(1918) <스핑크스의 고뇌>(1920)를 통해 해외문학이론을 수용,
-개성적 운율과 조선시형을 강조:<시형의 음률과 호흡>(1919),<작시법>(1925)등
-1915년 경 부터 작품을 발표: 자유시 <이별>, <야반>, <나의 적은 새야>,
산문시 <내의 가슴>, <밤과 나>
이상화(李相和) 1901∼1943
호 무량(無量) / 상화(尙火) / 상화(想華)
생년 1901.4.5 대구출생,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 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栢)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 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 간 대구 교남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
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嘆)〉(1922)·〈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고, 복합적인 인습에의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 夢幻病〉(개벽, 1925)·〈비음 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의 사회참여적인 색조로 원숙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 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 〈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의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이상화 (李相和 1901∼1943) 약력]
시인. 호는 상화(尙火). 대구(大邱) 출생. 경성중앙학교와 일본 도쿄외국어학교 불어과를 졸업하였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박영희·김팔봉(金八峰)·김기진(金基鎭)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1927년 의열단 이종암(李鍾巖)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창조》 《폐허》 등의 상징주의·퇴폐주의운동에 가담하여, 초기에는 여러 경향의 시를 썼으나, 그 뒤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고 신경향파의 대두와 함께 경향성을 띤 작품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 《말세의 희탄》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단조(單調)》 《이중의 사망》 《이별》 《가장 비통한 기원》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백기만(白基萬)의 《상화와 고월(古月)》에 수록된 시작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 있다. 대구 달성공원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한용운(1879∼1944)
-아명은 유천.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1879년 7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1896년 동학운동 실패로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피신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불문에 귀의. 수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08년경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이 무렵 이회광 일파가 친일활동을 펼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박한영 등과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기도 하였다.
-1913년에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불교의 구세주의, 진보주의 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 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 주재하였고, 3.1운동 때는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 세칭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1922년 출옥, 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내설악 백담사에서 1925년에 쓴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는 1918년 <유심>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 <후회>, <박명> 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 한권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50세를 전후하여 성북동 심우장에 은거하면서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경성지부장을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는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조선불교동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에는 <불교>지를 인수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키다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고,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 <<한용운전집>>을 간행하였다. 1991년에는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
정지용(1902∼ ? )
1903년 5월 15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휘문고보 재학 중에 박팔양 등과 함께 등사판 동인지 <요람>을 발간한 적이 있으며,
1926년 <학조>에 시 <카페 프랑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펼쳤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세 단계의 변모과정을 거친다.
1925년경부터 1933년경까지의 감각적인 이미지즘의 시,
1933년 <불사조> 이후 1935년경까지의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적인 시,
그리고 <옥류동>, <구성동> 이후 1941년에 이르는 동양적인 정신의 시 등이 그것이다.
종교적인 시가 초기의 감각적인 시와 후기의 고전적인 시들의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종교시는 1934년 <다른 하늘>, <또 하나의 다른 태양> 이후 자취를 감추며, 4년 여의 침묵 뒤에 <옥류동>, <봉>, <구성동> 등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정신으로 극복하려는 정신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선명한 심상과 절제된 언어로 포착해내는 시를 썼다. 감정을 감각화하는 방법은 철저한 언어적 자각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감각적 심상을 빌려 정신적 고요의 공간을 빚어내는 시적 표현과 구성의 긴밀성을 보여준 <장수산>, 영혼을 비추는 물의 명징성을 통하여 시적 인식의 객관화에 도달한 <백록담>은 매우 뛰어난 수준의 작품이었다.
서구추수적인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을 넘어서서 우리의 오랜 시적 전통에 근거한 산수시의 세계를 독자적인 현대어로 개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시집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산문집 <문학독본>, <산문>을 발간하였다.
김영랑(1903∼1950)
본명은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청산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향리에 머물렀다. 광복 후 오랫 동안의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발표된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영랑시집>과 자선시집 <영랑시선> 이 있다.
신석정(1907~1974)
신석정(1907년 7월 7일 ~ 1974년 7월 6일)은 한국의 시인이다. 본명은 석정(錫正)이며, 아호는 석정(夕汀)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수학했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 ·15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역시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 그 뒤 계속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주로 전원적인 시를 썼다.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 釋靜·石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
시인(1907~1974). 본명은 석정(錫正). 낭만주의 시를 많이 썼으며, 작품에 <슬픈 목가(牧歌)>, <촛불>, <산의 서곡(序曲)> 따위가 있다.
이용악(李庸岳, 1914년 ~ 1971년).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 재학중이던 1935년, 신인문학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소속으로 활약하다 미군정에 의해 수감되었으며 1950년 6·25 전쟁 당시 월북했다. 월북한 지 21년이 지난 197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북국의 가을》,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낡은 집》, 《슬픈 사람들끼리》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이 있다.
그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드는 상업에 종사했으며, 줄곧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보통학교를 거쳐 1938년 도쿄[東京]에 있는 죠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시절 김종한과 동인지 〈이인 二人〉을 펴냈다. 형 억(億)과 동생 용해(庸海)도 〈신인문학〉·〈국민문학〉 등에 시를 발표한 바 있다.
1939년 귀국해 〈인문평론〉 편집기자로 근무했고, 1942년 6월까지 〈조선일보〉·〈춘추〉 등에 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8·15해방 후 〈중앙신문〉 기자로 있으면서 1946년 2월 8~9일 조선문학가동맹이 개최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에 참가한 인상기를 남겼다. 같은 해 3월 윤곤강과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시부(詩部)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뒤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1937년 도쿄 삼문사에서 첫시집 〈분수령〉과 1938년 제2시집 〈낡은 집〉을 펴냈다. 1949년 시 〈오월에의 노래〉가 오장환의 시 〈병든 서울〉,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와 함께 해방기념 조선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이어 제3시집 〈오랑캐꽃〉(1947)을 펴냈고, 1949년 1월 동지사에서 현대시인전집의 제1집으로 〈이용악집〉이 나왔다. 그의 시는 북국 유랑 체험과 가난, 노동으로 지탱했던 유학 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초기에는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고향을 배경으로 한 〈북국의 가을〉(조선일보, 1935. 9. 26)·〈두메산골〉(순문예, 1939. 8) 등을 발표했고, 이어 만주 등지를 유랑하는 한민족의 피폐한 삶을 탁월한 시어로 형상화한 〈오랑캐꽃〉(인문평론, 1939. 10)·〈전라도 가시내〉(시학, 1940. 8) 등을 발표했다. 8·15해방 후에는 새나라 건설로의 열려진 가능성과 투쟁을 노래한 〈거리에서〉(신천지, 1946. 12)·〈빗발 속에서〉(신세대, 1948. 1) 등을 발표해 민족시의 다양한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월북 후 1952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 위원장, 1956년 조선작가동맹 출판사 부주필로 근무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유명한 서정시 〈평남관개시초〉(조선문학, 1956. 8)와 가사 〈땅의 노래〉(문학신문, 1967) 등을 발표했다. 그밖의 시집으로 북한에서 〈이용악 시선집〉(1957), 남한에서 〈이용악 시전집〉(1988)·〈북쪽은 고향〉(1989)·〈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등이 출간되었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 1912년 7월 1일 ~ 1995년 1월 경)은 북조선의 시인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1936년 시집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50여편의 작품을 더 발표했으나 시집은 더 이상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기를 즐겼으나 분단 이후 북조선의 방언 억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한국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많은 작품을 지었다. 그의 시에는 한국 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둔 고향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이를 토대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민족의 삶의 모습을 노래했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기행시에서도 그의 고향 인식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중의 삶을 형상화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1]
남한에서는 북조선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소개된 이후 많은 재평가를 받고 있다. 특유의 평북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3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남한에는 알려져 있었으나 그가 1995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들어 알려졌다.[2]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
'문학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비평론의 유형과 분석. 역사전기비평에서 페미니즘 까지 (0) | 2009.05.14 |
---|---|
현대문학강독 -작가별 정리/펌 (0) | 2009.04.25 |
고전소설강독 (춘향전과 황진이의 거리) (0) | 2009.04.25 |
서평쓰는 법1 (0) | 2009.04.25 |
고전 소설 강독 요점 정리 (0) | 2009.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