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교양방

바로크

목향의 서재 2008. 12. 8. 20:12

바로크 시대는 포르투칼 어 barocco에서 유래 하였는데 그것은 '모양이 고르지 못한 진주' 혹은 '돌멩이'를 가르켰다고 한다.

 

바로크의 모토는 " 보고 싶고, 알고 싶고, 갖고 싶다" 였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서구 식민지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의 팽팽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이다.

 

 루이 14세 '태양왕'이라 불렸으며 절대군주정치로 70년동안 프랑스를 지배했다.

죽을 때에는 아들에게 자신과 같은 정치를 펴치말고 성군이 될 것을 유언하였다.

 

게다가 루이 14세가 이루어낸 절대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더욱이 그랬다.

식민지의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고, 시민계급이 성장하게 되면서 부르주아 출신들이 군주의 행정기구에 편입이 되면서

 

새로운 지도세력으로 등장하며, 귀족들의 사치품도 서민집의 장식품이 될 정도로 예술품이 넘쳐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 자연세계가 넓은 것에 대한 인식과 우주의 무한성을 발견한 시기였다.

 

그래서 17c풍겨화는 대체로 넓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고 조그만 인간의 모습을 넣고 있다.

 

바로크 시기는 고전시대와 르네상스 시기의 한 가운데 놓였던 특징적이었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조화로움을 강조하는 사조와 반대되는 성향으로 파괴와 자유 분방함을 지향했다.

 

이것은 장 루세가 고전시기와 결부되어 있던 고전시대 초기의 특정된 시기를 구분하여 떼 놓은 것이다.

 

바로크의 역동성을 증명하는 '물'

 이 조각은 바로크양식을 대표하는 역동적인 조각의 분수이다.

 

 

 

이름과 성향으로 알 수 있듯이 바로크의 지향점은 '역동성'이다.

 

그들은 그래서 물과 샘을 중시하였고 자유롭게 변화가 가능한 것들을 중요시 했다.

 

이와 같은 변신이 눈부신 곳이 연극계인데 기이한 효과가 가득한 연극을 상연하곤 했다.

 

그러므로 전시예술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형예술 또한 종교적 또는 신비적 감정의 격렬한 움직임과 광란하는 격한 감정등이 표현되고 있다.

 

그렇기에 바로크의 예술은 화려함의 극치로 보여질 수 있다.

 

삶의 충일함, 풍요로움, 다양성 등이 그것이다. 바로크의 역동성과 파괴성은 자유로움이지

 

후에 나타난 초현실주의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작가 '비발디'

- 그의 작품 '사계'는 바로크시기의 '역동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바로크의 삶을 다양한 모습 가운데서 포착하게 되는 것은,

 

낭만주의에 있어서와 같이 삶의 궁극적인 결함과 비참을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단한 변신과 유동성에 현혹되어 즐기는 자체인 것이다.

 

 

움직임과 변화, 생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며 전시한다.

 

변신, 전시, 환각, 효과의 예술이기에 장 루세는 키르케(변신)과 공작(전시)라는 상징으로 정의하고 있다.

 - 키르케는 그리스의 신화속에 나오는 여신인데 Aiaia라는 섬에서 오는 사람들을 모두 동물로 변신시켜 버리곤 했다.

 

 

조화와 안정, 질서와 규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속에서 바로크를 발견한 장 루세도,

만들어 진 이데올로기가 아니나, 드러내질 수밖에 없었던 바로크의 양식이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루이 14세의 비극적인 운명도 말이다.

 

이런 진행되는 사조에 대한 반대성향과 자유의 추구,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으로 억압되어졌던 서민들의 반발에 대한 자극이

후에 프랑스 혁명에 절대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의미에서 루이 14세는 궁극적으로 세기를 망쳤지만,

 세기에 보탬이 되는 크나큰 결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그것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