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리고 글

[스크랩] 백년 종점 외 / 서규정

목향의 서재 2015. 6. 22. 22:01

 

 

 

 

백년 종점 / 서규정

 

 

탱크도 지날 멀쩡한 교량보다, 오래 전에 무너진 다리가

녹슨 철골을 다 드러내놓고 폐허를 자랑하듯

 

끊어져야 아름답다

 

그대에게 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폭파된 다리만 찾아 헤맨다

 

 

 

 

 

 

처음처럼, 저음으로 / 서규정

 

 

보경사 뒤쪽 산엔 열 두 폭포가 있네
우왕좌왕 소리에 소리를 섞어 내리는
쌍생폭포 앞에 서서 사람 하나를 지우려는데
시장 좌판에 생선비늘처럼 눈이 다 타들어 간다면
어느 빼어난 풍광이, 장님만 하며
어디 고운 노래가, 귀머거리만 하고
아무리 깊은 시도, 벙어리 가슴만 하리

 

바람이 불면 가야 한다 가야만 한다
민들레 홀씨 저 떠나온 자리 다시 찾으러 날 듯
인적 끊긴 하늘로 누구야 누구누구 따로 부를 것 없이
폭포야 폭포 폭포가 폭포를 부르듯 복창한다
꿈속에서도 열 두 번은 더 사랑한다 당신
처음처럼, 저음을 알아듣는 옆구리의 내 당신을

 

 

 

 

 

잘 가라 로맨스 / 서규정

 

 

새, 가끔씩 가슴을 따주던 열쇠들이 저렇게 높이 떠 날아가선

 

자물통 같은 몸통을 열어주려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달그락거렸던 건

외로움이 곁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새알 하나

 

그것이 새털보다 많은 날들을 뒹굴고 뒤채이며

날개 짓을 했던 이유일 것이다

잘 가라 로맨스

 

깊은 강이 왜 곁쇠 구멍처럼 소용돌이치며 흐르는지

곁쇠질만 남긴 몸통은 잠시 몸부림이란 좌판을 벌렸어도

 

새는 열쇠 가게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곁쇠, 제 짝이 아닌 짝퉁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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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통과 열쇠를 통해서 단순한 성적묘사에 그쳤다면

이처럼 아름답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달그락거렸던’ 것은 외로움이

만들었던 결쇠였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영혼의 알몸까지도

기꺼이 여줬기에 이처럼 애틋하다는 것.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새알 하나’가 지금까지 시인의

날개에 힘을 실어줬듯이, 또 다시 훨훨 날아가는 새였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기다려온 가슴 하나를 활짝

열어줬으면. 더 이상은 짝퉁이 아닌 열쇠가 되어.

 

한혜영 시인

 

 

 

 

 

화왕산 참배 / 서규정

 

 

화왕산에 붙은 단풍 불, 낙동강에서 물길 잡아올 틈도 없게

새떼들이 까르르르르 자그르르르 몰려다니다

머리 위로 덮이듯 금방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그물망이다, 그리고 처음이다

주목 받지 못해 언제나 주변부를 얼쩡거리다

지주목처럼 그물 속으로 고갤 쑥 빼들고 둘러본다면

 

아 하늘이란 막이 하나, 막 젖혀진 무한천공 정중앙에서

이름이라도 멋들어지게 갈고 싶을 때

 

쉬잇! 알고 보면 나도 새,

 

태어나 철들기 전부터

제 가슴 속에 둥지를 튼, 철새의 이름을 대체 뭐라고 바꾸지

 

- 서규정 시집 『 참 잘 익은 무릎 』 2010

 

 

 

 

 

내 안의 블루 / 서규정

 

 

낙석 하나가 분화를 꿈꾸는 지층을 깨우듯

내 몸을 흔드는 정체불명의 힘,

블루라는 낯선 말이

간간이 극장 포스터나 술집 이름으로 등장할 때에도

뭐 현대인의 색다른 기호나 유희성이겠거니 하다가

자갈치 물양장에서 은하호를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어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교각 밑에선 노약자 노숙자들은 노을과 놀고

관리들은 꼬리 잘린 도마뱀과 놀고

공적자금은 밑 터진 독과 놀고

우울이 껌처럼 늘어붙는 거리

평생을 구두 발자국만 새긴 어느 판화가의 생애를 위해서라도

어디로 떠나가 줄까 더 이상

발자국을 뜯어 먹히기 싫어…그러니까

얼마나 이 땅의 기다림과 그리움들이 다했으면

덧문을 닫아 걸 이 나이에

나를 끌어내는 정염의 덩어리를 찾아

맨발로 99톤 은하호에 오르기 전에

 

가방에 담았던 면도기 치약 몇 권의 노트를 꺼내고

내 그림자와 백병전을 벌이던 몸통을 쑤셔 박았지

자크를 열고 나오려는 팔다리를 우둑우둑 분질러

다져 넣으며 나도 모르게

죽어서 다시 살아!

손에 묻은 분진을 털며 외쳤어

 

- 서규정 시집 『 겨울 수선화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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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로 떠나기 직전에 건져 올린 대어 같은 시

 

- 서규정의 시「내 안의 블루」를 읽고

 

 

시인이 바다로 가겠다고 했다.

모든 이의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승선에 필요한

절차를 눈 깜빡할 사이에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뭍을 떠나 버렸다.

 

분명히 동기는 있었을 터이다.

자신의 소진해가는 에너지를 충전 받고자 했을까?

뭍에만 묻어둘 수 없었던 열정들을 풀어내려고 했을까?

나는 그때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못 채운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보통 사람에게 번뇌는 소유의 욕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시인에게 그것은 물리치고 꺾이는 갈등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아니 몸서리쳐

지는 자기 자존의 가벼움 때문에 훌쩍 뭍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의 기질대로라면 시인은 바닷물을 다 퍼

담아 오거나 바닷물을 다 메워 버리고 올 것이라고 여겼다.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시인은 뭍으로 돌아왔다.

시인이 감당하기에 바다는 너무 완강하고 무지막지 했을지도

모른다.

 

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안의 블루>는 배를 타기 전,

배를 타야겠다는 의지를 심어준 대사건과 심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갈치 물양장에서 은하호를 처음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고 말한 시인의 고백은 그러니까 시적 과장이

아니라 변화 앞에서 신바람을 내는 시인의 기질적 특성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이나 관련 분야 전문가가 아닌

경우, 배를 탄다는 행위는 일종의 파국 뒤에 선택한

막장의 승부수인 경우가 많다.

시인이 가져야 할 덕목 중의 하나는 그런 파국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시적 감각은 평탄하고 안온한 것에서 발동하지 않고 대체로

극단의 상황에서 발동한다.

자신이 타고 나가야 할 배를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

올랐다는 시인의 고백은 뭍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고 그 위기감은

어떤 손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평탄하고

고요한 일상에서 촉발하였을 것이다.

 

이 시에서는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교각 에선 노약자 노숙자들은 노을과 놀고/ 관리들은

꼬리 잘린 도마뱀과 놀고/ 공적자금은 밑 터진 독과 놀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불만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시인을 못 견디게 한 것은 그런 외부적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묵묵히 수락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미온적 태도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다.

 

‘우울이 껌처럼 늘어붙는 거리’에서 ‘더 이상/ 발자국을

뜯어 먹히기’ 싫다는 절규, ‘자크를 열고 나오려는 팔다리를

우둑우둑 분질러/ 다져 넣으며’ ‘죽어서 다시 살아! 하고

외친 시의 후반부에는 일상에 길들여진 자신을 과감히

내치고 있는 시인의 아픈 몸부림이 있다.

 

시인의 승선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 최영철 시인

 

 

 

 

출처 : 淸韻詩堂, 시인을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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